▶ <듀크 김, MD, voyage4mars@gmail.com>
시카고 Lyric 오페라 극장. 푸치니의 ‘Madama, Butterfly’에서 쵸쵸상이 부르는 아리아 ‘Un bel di, vedremo’(화창한 봄날에)가, 가득 메운 객석 위로 고요히 이는 바람처럼 울려 퍼져나간다. 열다섯 살의 게이샤 쵸쵸상이 미국 해군 중위인 핀커튼을 만나 결혼하지만, 그는 곧 미국으로 떠나 돌아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의 사랑을 믿고 어린 아들과 함께 오랜 세월을 희망 가운데 기다렸지만, 그는 미국에서 결혼한 아내와 함께 돌아온다. 그 잔인한 현실 앞에서 쵸쵸상은 절망 가운데 빠져, 결국 단검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비극적 결말로 막을 내린다.
4월 초 워싱턴 지역은 어느새 벚꽃이 질 무렵이었다. 아침 열시경에 도착한 시카고의 하늘은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간간이 내리는 차가운 빗방울이 왁스 칠이 된 재킷을 타고 흐른다. 낮게 깔린 하얀 구름에 몸을 감춘 고층 빌딩들은 마치 커다란 검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음울한 숲속을 연상케 한다.
미국에 살면서 몇 차례 오헤어 공항을 경유한 적은 있었지만, 정작 도시를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었기에 시카고는 오래 전부터 언젠가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도시 중 하나였다.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는 미시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나는 첫날 첫 번째 일정을 위해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RiverWalk를 따라 시카고의 마천루 사이를 항행하는 아키텍처 크루즈를 타기 위해서다. 90분간 계속되는 선상 투어는 간간이 빗방울을 동반한 세찬 바람으로 인해 추위에 떨기도 했지만,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거대한 빌딩들 감상에 열중하다 보니 그 시간도 금세 지나고 만다. 시카고라는 도시가 단순한 현대적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루즈에서 내릴 무렵의 도시는 어느새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황금색을 머금은 가로등 불빛은 차가운 도시의 거리를 은은하게 비추며, 시카고의 밤을 한층 더 고혹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물들여 가고 있다. 저녁은 예약해놓은 ‘앤디스 재즈 클럽’에 들러 카운터 바에 앉아, 흥겹다가도 때론 애잔한 음색으로 흐르는 라이브 재즈를 들으며, 음식과 맥주를 즐기는 중에 시카고의 밤은 깊어만 간다.
둘째 날 이른 아침, 여전히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지만, 나는 런닝 수트로 갈아입고 호텔 문을 나선다. 호텔 앞 미시간 호숫가에서 달리기 시작하여 리버워크 관문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시카고의 마천루 숲이 눈 앞에 펼쳐진다. 잘 정돈된 트레일 위를 달리며 맞는 거센 바람은,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지며 기분이 한층 고조되어 달리는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가볍기까지 하다. 60대 중년의 남자가 홀로 누리는 이 자유로움을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이 순간의 나는 호수 위를 나는 한 마리의 갈매기가 된 것 마냥, 이 차갑고 세찬 바람을 온 몸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브런치 카페에서 오믈렛과 커피로 아침을 마치고, 호텔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세계 3대 미술관 가운데 하나로 30만점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곳은, 특히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컬렉션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최근에 작가 서머셋 모음(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펜스’를 읽고 난 후라 나는 특별히 폴 고갱의 작품에 더 큰 관심이 갔다. 소설 속 인물의 삶과 겹쳐 보이는 그의 그림들을 실제로 마주하니, 작품감상이 한층 더 깊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밖에도 일본관 중국관과 한국관이 따로 있어, 세 나라의 예술품을 한자리에서 관람하고 비교 할 수도 있어서 이 또한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마침내, 미술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A Sunday on La Grande jatte)라는 작품 감상을 끝으로 출구 쪽으로 향하던 중, 나는 뜻밖에도 보물이 가득한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Korean National Treasures’라는 싸인 보드가 서 있어 따라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워싱턴 D.C에서의 전시회를 마친 ‘이건희 컬렉션’이 시카고 미술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워싱턴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을 한국일보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놓치고 말아 아쉬움도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우하게 되다니 정말 큰 행운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우며 이름만 들었던 박수근, 이중섭, 김기창 같은 한국 미술사의 거장들의 작품을 실제로 눈앞에서 마주하는 순간, 벅차오르는 감동과 우리 문화에 대한 큰 자부심이 밀려왔다. 전시장을 나서는 출구 쪽 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건희”
미술관을 나서니 바로 근처엔 밀레니엄 파크가 있어 커다란 강남콩(Cloud Gate) 앞에 서서 인증샷을 찍고, 미시간 애비뉴를 따라 천천히 서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거리 양편에는 현대적인 유리 빌딩들과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세련된 상점들과 사람들로 거리는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시카고는 차갑고 거대한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품위 있는 클래식한 분위기를 함께 간직한 것처럼 느껴진다. 리버워크 강변의 전망 좋은 자리에는 초현대적인 모습의 거대한 Trump Tower Chicago가 우뚝 솟아 있고 압도적인 높이와 존재감 때문인지, 그곳은 수많은 관광객들의 인기 포토존이 되어 있었다.
몇 블록을 더 걷자, 미국 최대 규모라는 Starbucks Reserve Roastery Chicago 매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1층부터 4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진 내부는 마치 백화점에 들어선 것 같았고, 그곳엔 커피 향과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듯한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에 케이크 조각을 곁들이며 창밖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나도 이 도시의 한 사람, ‘Chicagoan’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밤, 오페라 하우스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화려하게 조각된 높은 천장에 매달린 황금빛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는 이브닝 가운과 턱시도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관람객들이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페라는 처음이지만, 이전에 뮤지컬과 오케스트라를 관람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 분위기가 아주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공연 시작 전, 로비에서 와인 한잔을 마시며 팸플릿을 넘겨 보던 중, 나는 뜻밖의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오페라의 프리마돈나가 한국인 손현경(Karah Son)이며 전 세계 유수의 오페라 무대에서 300회 이상 <나비부인>의 쵸쵸상을 소화해낸 관록의 소프라노라는 것이었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공연 자체가 처음 접하는 나에게는 길고 어렵게 느껴질만 했지만, 그녀가 부르는 아리아와 섬세한 연기에 몰입되어 어느새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마침내 공연이 끝났을 때, 화려한 금빛 문양으로 장식된 4층 규모의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보내는 뜨거운 박수갈채는 그칠 줄 모른다.
공연장 문을 나서니, 여전히 굵은 빗방울과 세찬 강바람이 어둠이 깊게 드리워진 빌딩 숲 사이를 휘감고 있었다. 나는 자켓의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넣은 채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밤을 천천히 걸어본다.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에 아른거리는 가로등 불빛을 밟으며 시카고의 밤거리를 걷는 이 시간은, 나의 지난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는 오롯이 나만의 성찰의 시간이었다.
미국에 정착한 지 20여 년이 지나고 그새 60대에 들어섰다. 아무도 의지할 곳 없고 만만치 않은 이민 생활 속에서도 “참 잘 살아왔구나. 그래서 고맙다”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며 “앞으로 남은 인생의 여정도 새로운 여행을 통해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재충전해가며 살아가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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