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변화 ‘밥상의 위기’
▶ 소득하위 20%, 월 식비 비중23%
▶ 무 190%, 양배추 168% 가격 뛰어
▶ 이상기후 물가에 건강식 언감생심
▶ “과일은 기초수급비 나오면 딱 한번”
누군가는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필요한 물품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기후위기와 물가 상승을 접목한 단어인 ‘기후플레이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다는 얘기다.
통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소득 하위 20%(1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비지출은 129만6,000원이다. 이 가운데 식료품·비주류음료 지출액은 29만3,000원으로 22.6%의 비중을 차지해 다른 소득 분위에 비해 가장 높았다. 음식·숙박 비용(17만3,000원·9.5%)까지 포함하면 비중은 32.1%로 올라간다. 식료품 비중은 소득이 높을수록 축소되는데, 소득 2분위는 17.6%, 3분위 15.3%, 4분위 14.1%, 5분위 12.4%였다.
기후위기는 물가를 끌어올린다. 한국은행은 ‘기후변화가 국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일시적으로 기온이 1도 상승하면 농작물가격 상승률은 0.4~0.5%포인트, 전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0.07%포인트 상승한다고 분석했다. 세계적으로 기후가 변하면 국제 식량가격→수입 물가→국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국내 기후변화로 국내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특히 기온 1도 상승이 1년간 지속되면 농산물 가격은 2%, 전체 소비자물가 수준은 0.7% 높아질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연평균 기온이 14.5도로 평년(12.5도) 대비 2도 높았고, 이는 종전 1위를 기록했던 2023년(13.7도)보다 0.8도 높은 역대 최고 기록이라는 최근 기상청의 발표를 감안하면, 지난 2년여간 치솟은 밥상 물가와 그에 따른 저소득층 타격이 심상치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한국일보는 한 달여에 걸쳐 저소득 소외계층 아동·중장년·노인 등 18명을 대면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식비 상승에 따른 생활난을 들었다. 구호단체인 월드비전과 희망친구 기아대책, 저소득층 지원단체인 서울 삼양주민연대,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 우양재단, 구로행복도시락, 은광지역아동센터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면 ‘천원 한 장’이 아쉬운 취약계층은 신선식품을 더 구입하기 어려워진다. 지병을 달고 사는 독거노인 등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영양 불균형은 이미 나빠진 건강을 더 쉽게 무너뜨리고, 빈곤을 심화시킨다. 매달 나가는 약값을 줄이기 어려워 의료비 지출이 늘수록 식비 지출은 감소하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진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서 홀로 사는 박헌옥(74·여)씨는 2017년부터 장폐색증을 앓고 있다. 대장이 마비돼 변비를 달고 산다. 이 탓에 신선채소를 먹으려 하지만 채소값이 껑충 뛰면서 부담이 늘었다. 국민연금과 월세 수입 등 월수입은 약 170만 원이다.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지만, 장폐색증과 당뇨, 고혈압 등 약값에 드는 비용이 만만찮아 식비 비중을 늘릴 수가 없다. 케일과 로메인 같은 쌈야채가 본인의 질환에 좋다지만, 저렴한 양배추나 시래기를 구입하는 이유다. 이마저도 가격이 뛰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제주농산물수급관리센터에 따르면 겨울철 전국 식탁에 오르는 제주산 월동채소 가격은 새해 초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박씨가 자주 먹는 양배추는 지난해 1월 평균가와 비교해 168%나 올랐다. 월동 무도 190%, 당근은 153%, 브로콜리도 58%가 올랐다. 재배면적이 줄어든 영향도 있지만 폭염 등 기상 악화로 생산량이 감소한 탓이 절대적이다. 박씨는 “변비에 좋다는 케일이나 사과는 가격이 너무 비싸 살 수가 없다”며 “그나마 저렴한 알배추로 대신하지만 1개에 2,000원 정도로 부담된다”고 토로했다.
2020년 퇴행성 관절염 수술을 받고 일이 끊겨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주재종(52)씨도 건강과 식비 사이 악순환에 갇혀 있다. 몸이 아파 안정적 소득 창출이 어렵고, 제한된 수입 탓에 건강을 지키는 식사는 불가능하다. 주씨는 수급비 70만 원이 수입의 전부인데 식비로만 30만 원을 쓴다. 올해 채소값이 급등하면서 된장국에 넣을 수 있는 버섯이나 콩나물 같은 간단한 야채만 사고 있다. 무생채 비빔밥을 좋아한다는 주씨는 무값이 너무 올라 포기했다. 무 1개 가격은 9일 기준 3,191원으로 전년(1,807월) 대비 76.6%나 뛰었다. 자선단체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으로 겨우 부족한 채소를 보충하는 상황이다. 건강을 위해 채소를 먹으려 노력한다는 주씨는 “과일 가격도 많이 올라 수급비 받으면 그때 딱 한 번 사 먹는다”고 말했다.
기후인플레이션에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한 노력을 보면 고단함과 애환이 느껴진다. ①발품을 팔아 여러 시장을 돌아다니고 ②가격이 오른 식품은 아예 사지 않거나 ③증가한 식료품 지출에 맞춰 다른 항목 지출을 줄이는 방식이다. 결국 수입이 늘지 않으니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으로 귀결된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거주하는 70대 노인 이모씨는 장을 보러 동대문구 제기동의 경동시장까지 간다. 단돈 1,000원이라도 아끼고자 당뇨를 앓는 아내와 운동 삼아 다닌다는 것이다. 집에서 경동시장까지 약 20㎞ 떨어져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리지만, 인근 마트보단 훨씬 저렴하기에 이 정도 품은 기꺼이 감수한다. 이씨는 “연금 등 합치면 월 수입이 160만 원인데 식비로만 80만 원이 나간다”며 “물가가 오른 탓에 외식도 포기했고 고기와 과일은 비싸서 못 먹는다”며 “지병이 있는 아내를 위해 채소를 사야 하는데 싼 곳을 찾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둘이 사는 김모(70·여)씨는 시장에 갔다가 채소 가격에 놀라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먹지 않을 도리가 없어 찾고 또 찾은 게 콩나물이다. 콩나물 340g 가격은 9일 기준 2,418원으로 전년(2,391원)과 거의 비슷하다. 본보와 인터뷰한 취약계층 18명 중 10명이 콩나물을 주로 산다고 말했다. 문제는 콩나물도 기후위기에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 올여름 이상기후 여파로 전북·전남지역 콩나물콩 수확량이 70%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전주 콩나물콩은 지난해 6월부터 파종을 시작했지만, 지속적 폭염과 잦은 비로 생육 저하와 병충해 피해가 잇따랐다.
서울 은평구에서 3남매(고2·중2·초6)를 혼자 키우는 박진원(46)씨는 날로 커지는 식비에 옷 구매를 최대한 줄이고 있다. 공연 기획 프리랜서로 일하다보니 월평균 400만 원 정도 벌지만 식비만으로 150만 원 정도가 든다. 그나마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기도 덜 먹고, 과일도 동네 흠집 있는 것만 사는 등 식비를 최대한 줄였는데도 이 정도다. 박씨는 대신 옷을 대물림해 의복비를 줄이고 있다. 아직 학생이니 트레이닝복 위주로 사주지만, 마음에 늘 걸린다. 박씨는 “옷 대물림은 초등학교까지만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지키지 못하고 있다”며 “신발 산 지도 1년 6개월 정도 지났는데, 새 걸 사주지 못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서울 관악구에서 월 2,000여 명에게 급식·도시락을 제공하는 고독사 예방 비영리단체 해피인이 지난해 쓴 한 달 식자재 비용은 평균 400만 원이다. 쌀·고기 값은 제외한 비용인데도, 전년(300만 원)보다 35% 정도 올랐다. 이용자 중 중장년층이 60%인 만큼 당뇨·고혈압 등 환자가 많아 신선식품을 많이 제공하고 싶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기후위기 탓에 채소류 물가가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박보아 해피인 대표는 “작년에는 서울시에서 5,000만 원을 지원받아 운영에 도움이 많이 됐는데, 올해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후원비로 충당해야 한다”며 “껑충 뛴 식재료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고 호소했다.
청년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김치찌개를 3,000원에 판매하고 있는 청년문간사회적협동조합의 이성구 사무국장은 “김치찌개 한 그릇 원가가 2017년 2,000원대 후반이었지만 2023년 말에는 5,920원이었다”며 “이상기후 등으로 식재료비는 6년 만에 2배 이상 뛰어 앞으로가 걱정스럽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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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원·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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