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처는 미국이 정하지만 돈은 일본이
▶ 투자금 날려도 미국에는 페널티 없어
▶ 일본 “대출·지급보증으로 달러 마련 가능”
3,500억 달러(500조 원). 최근 한국을 괴롭히고 있는 숫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이 이 금액을 미국에 일시불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관세를 25%에서 15%로 내리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하란 것이죠.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하는 금액은 지난달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4,400억 달러)의 80%에 이릅니다. 미국의 요구를 곧이곧대로 들어줬다간 달러가 바닥날 상황이니, 한국 입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의 선택은 한국을 더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일본은 지난달 4일 5,500억 달러(약 782조 원)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합의하고 양해각서(MOU) 체결도 마쳤습니다. 일본이 트럼프 대통령의 무리한 요구를 먼저 받아들이면서 한국은 난감해졌습니다. 일본은 먼저 협상을 체결한 덕에 자동차 관세가 15%로 내려가, 25%를 적용받는 한국 자동차 기업들의 미국 내 경쟁력이 떨어질 우려도 큽니다.
■미·일 MOU… 역대급 불평등 합의?
그런데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이 MOU, 구체적 내용은 어떨까요? 일각에선 이면합의를 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로 일본에 불리한 조건이 가득했습니다. 일단 5,500억 달러를 일시불로 내는 구조는 아닙니다. 미국이 투자 계획을 세우면, 일본은 이를 위해 설립된 특수목적법인(SPV)에 정해진 투자금을 달러로 입금합니다. 미국은 이 같은 방식으로 최대 5,500억 달러를 일본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습니다. 돈은 일본이 내지만, 투자처 최종 결정 권한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수익 배분 구조도 일본에 불리합니다. 일단 원금이 회수될 때까지는 미국과 일본이 50대 50으로 수익을 나눠 갖습니다. 원금이 회수된 이후에는 미국이 수익의 90%, 일본이 10%를 가져갑니다. 만약 투자에 실패한다고 해도 투자처를 결정한 미국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일본만 투자금을 날리는 셈이죠.
이에 미국이 위험도가 높은 투자처를 고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투자에 성공하면 이익의 90%를 가져가고, 투자에 실패해도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MOU에 일본이 투자를 거부할 수 있다는 문구가 있지만, 그러면 미국이 다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내용이 MOU에 담겨 있습니다. 관세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 투자하는 건데, 미국이 관세를 다시 부과한다면 무의미하죠. 일본 입장에서는 섣불리 투자를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투자를 거절하면 일본이 돌려받을 수익금도 줄어듭니다. MOU는 ‘캐리 오버(carry over·이월)’라는 용어로 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미국이 100억 달러 투자를 요청했는데, 일본이 이를 거부한다면 100억 달러가 캐리 오버 금액으로 쌓입니다. 이는 일본이 미국에 갚아야 할 돈이 됩니다. 기존 사업의 수익금 중 일본 몫은 일본 정부에 돌아가지 않고 이 캐리 오버 금액을 상환하는 데 사용됩니다. 거부한 투자액을 부채로 전환하는 방식입니다.
일본 경제 전문가들도 MOU가 불합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 경영컨설팅 업체 노무라종합연구소의 기우치 다카히데 이코노미스트는 칼럼에서 “5,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는 불평등한 약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표면적으론 불평등하지만… 나름 안전장치 마련한 일본
그렇다면 일본이 이 같은 불평등한 내용에 서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본과 미국의 MOU는 표면적으로는 일본에 불리해 보이지만, 일본은 나름의 안전장치를 MOU에 심어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일본이 100% 현금 투자를 하기로 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부터 살펴볼까요. MOU에는 일본이 “즉시 이용가능한 자금을 달러로 미국에 지급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도 여기서부터 비롯됐습니다. 반면 일본 관세협상을 이끌었던 아카자와 료헤이 경제재생담당장관은 “현금 투자는 1~2%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맞는 말입니다. MOU는 자금의 성격을 즉시 이용가능한 현금으로 규정했지만, 이 자금의 출처는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즉 일본이 원래 가지고 있던 달러를 지급하든, 대출을 받아 달러를 마련하든, 지급보증을 서든 간에 일단 미국의 통장에 실제로 이용 가능한 달러가 입금되기만 하면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시 이용 가능한 달러를 현금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아카자와 장관은 현금의 조달 방식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기에 일본이 보유한 현금 투자는 1~2% 수준일 것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위험한 투자처를 결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돼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처 최종 결정을 하는 건 맞지만, 일본과 미국이 참여하는 ‘투자위원회’에서 제시된 투자처에 한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일본 입장에선 수익성이 없는 투자처를 일차적으로 거를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한 것입니다.
‘양국의 국내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항도 일본의 자금을 보호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MOU상 투자 주체는 일본 정부입니다. 통상 정부 자금이 지출될 때는 각 나라의 법과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대개 지출 이유는 타당한지, 규모는 적정한지, 사업성은 어떤지 따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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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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