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나의 여행기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책 '슬픈 열대'의 첫 구절이다. '슬픈 열대'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그릇된 것임을 발견한다. 이 책의 형식은 브라질 여행기다. 여행을 생각하면 언제나 이 구절이 떠오른다. 여행을 자주 가진 않지만 그 여행의 끝에서 나 역시 종종 새로운 깨달음을 얻곤 한다.
이제까지 가장 인상에 남은 해외 여행지는 딸과 동행한 스페인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아이에게 여행이란 휴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마드리드, 톨레도, 바르셀로나를 찾아간 여정이었다.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프라도미술관에서 만난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이다. 고야가 마주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이 나를 사로잡았다. 고야가 담아낸 당대 인간과 사회의 실상이 내 생각의 깊이를 더했음을 스페인 여행의 끝에서 나는 깨달았다.
먼 나라만 인상적인 여행지는 아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주말에는 강원도로 놀러가곤 했다.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곳은 영월 별마로천문대다. 떠나기 전 오늘 밤 별을 관측할 수 있을지를 미리 알아보고 고속도로를 달려가니 거기 은하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는 반짝이며 흐르는 긴 별들의 강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밤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밤이 어두운 세계만은 아니었다. 다채로운 빛깔과 얼굴을 갖고 있음을 그때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서 여행 트렌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다. 여행지 선택이 넓어지고, 관광 못지않게 힐링이 중요해지고, 감춰둔 '부캐'를 만나기도 한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다. 그 탈주의 길 위에서 낯선 삶, 푸근한 위안, 또 다른 자아와 조우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휴식과 용기를 선사받곤 한다.
여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구절이 있다. 작가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3부작' 가운데 하나인 '유리의 도시'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곳에서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는 보들레르 산문시의 한 구절을 오스터는 인용한다. 이어 오스터는 이 시 구절을 "좀 더 의미에 맞게 해석한다면: 어디든 지금 내가 있지 않은 곳이 내가 나 자신인 곳이다"라고 자기 방식으로 풀어 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연히 살아가고 있는 '이곳'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곳의 타성을 벗어나 '저곳'에 있는 또 다른 삶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 21세기적 삶의 방식이 아닐까. 그 과정이 여행이고, 그러기에 여행이 이제 삶의 외부가 아니라 삶의 내부에 놓여 있다는 걸 깨닫는다. 긴 추석 연휴가 기다리고 있다. 어디 가까운 곳으로 1박 2일 여행 계획을 늦게나마 짜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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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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