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 자서전 펴낸 UCLA 치대 박노희 교수
▶ UCLA 치대 최장수 학장 역임 세계적 치의학 권위자
▶‘인생의 전환점: 나를 형성한 결정적 순간들’ 출간
▶“삶의 여정 기록… 다음 세대를 향한 조용한 응원”

박노희 교수가 UCLA 치대 연구실에서 자신의 삶의 전환점들을 회고한 영문 자서전을 들어보이고 있다. [박상혁 기자]
미국 내 최고 명문 치과대학의 하나인 UCLA 치대. 그 곳에는 자랑스러운 한인의 이름이 빛을 발하고 있다. 바로 지난 1998년부터 2016년까지 최장수 치대 학장을 역임한 박노희(81) 교수다. 지난 1984년 UCLA 치대교수로 부임한 그는 미국 내 아시아계 최초의 주요 치대 학장으로 선임돼 교육 및 연구 분야 향상과 기금증대 노력을 이끌며 UCLA 치대를 최고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세계적 권위의 이민 1세대 치의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반세기 세월을 치의학 발전에 헌신해 온 박 교수는 연구, 교육, 병원 운영이라는 세 축을 넘나들며 UCLA 치대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특히 제도 개선과 인재 양성, 연구기반 확대를 위한 굵직한 개혁을 주도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지 이러한 커리어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사람과 책임, 그리고 가치를 중심에 두고 전환의 순간들을 지나온 박노희 교수가 최근 영문으로 된 자서전을 출간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매일 UCLA 캠퍼스의 연구실에 나가며 연구와 강의에 매진하고 있는 그를 만나 자서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노희 교수는
비전의 리더이자 혁신가, 헌신적 교육자로 널리 알려진 박노희 교수는 1944년 충청북도 단양 출생으로,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뒤 조지아대 의대와 하버드대 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 교수를 거쳐 UCLA에서 오랜 기간 후학을 양성해왔다.
그는 바이러스 질환 및 구강암 치료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석학이다. 2001년 국제치과연구학회로부터 치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뛰어난 과학자상’을 수상했고, 2010년 가이스 치과학 교육자 부문 성취상 수상과 함께 UCLA 치대 및 의대의 ‘석학교수’에 선정됐으며, 한국 최초의 과학기술유공자 32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박 교수는 뛰어난 학문적 성취와 함께 교육 경영자이자 학장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UCLA 치대를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 중심의 치과대학으로 우뚝 서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세계적으로 우수한 학자들을 교수로 영입하는데 집중했고, 치의학 분야에서의 대학 리더들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 내에 리더십 프로그램을 만들고 1년에 10명의 학생들을 선발해서 집중적으로 리더십 교육을 시행했다. 그 결과 UCLA 치대 졸업생들 중에 미국내 대학 치대 학장이 배출되는 등 뚜렷한 성과를 도출해냈다.
이처럼 박 교수는 권위 있는 과학저널에 200편이 넘는 연구논문을 게재한 저명한 과학자이자 UCLA 치대를 명문 반열에 올려놓은 최고 경영자로, 그리고 후배들과 학생들의 탁월한 연구성적을 이끌어내는 뛰어난 멘토로 존경을 받아왔다.
■인생의 전환점
이러한 그가 최근 영어로 된 자신의 첫 자서전 ‘인생의 전환점: 나를 형성한 결정적 순간들(영어명 Turning Points: Moments That Shaped Me)’을 출간했다. 학장이나 교수, 연구자로서의 커리어보다 삶의 방향을 바꾼 순간들에 초점을 맞춰 삶의 궤적을 담담히 풀어낸 이 책에 대해, 박 교수는 “학교 이야기나 연구에 관한 내용은 많지 않다”며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겪은 성장과 상처, 그리고 회복의 여정을 돌아본다. 서울대 치대 재학 중 정동균 교수를 만나 연구의 길로 들어선 일, 군의관 복무 시절 리더십을 배운 경험, 미국 유학 후 영어가 서서히 들리고 말문이 트이던 시간, 바쁜 일정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신학 공부까지… 그의 삶에는 크고 작은 ‘전환점’들이 존재했다. 박 교수는 “인생의 전환점마다 날 이끌어주고, 때로는 조용히 곁에서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다”며 “아내, 지도교수, 친구들… 내 인생에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의 나로 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서전에는 충북 단양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서울대 치대 시절, 미국 유학과 UCLA 학장으로 보낸 18년의 시간까지, 박 교수의 삶을 이룬 전환점들이 차분히 담겼다. 그는 과학자로서의 업적뿐 아니라, 삶을 이끌어온 가치와 고민, 그리고 후학에 대한 책임까지 진솔하게 풀어냈다. 커리어와 성취를 넘어, 한 인간이 걸어온 여정 속에서 독자들 역시 각자의 ‘전환점’을 돌아보게 되는 기록인 것이다.
■진솔한 회고
박 교수의 자서전에는 아버지로서 느낀 후회와 회한도 솔직하게 담겨 있다. 박 교수는 “커리어 중심의 삶을 달려오며 가족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기억이 여전히 마음을 짓누른다”며 “UCLA에서 종신교수직을 제안 받고 이사 결정을 내렸을 때, 딸아이가 펑펑 울었다. 처음엔 왜 우는지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알고 보니 미국 이민 이후 아버지의 잦은 학교 이동에 따라 딸은 아홉 번이나 전학을 해야 했던 것이었다. 박 교수는 “내가 잘되면 가족도 잘될 거라는 생각에 딸의 학교생활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며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참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털어놨다.
늘 철저한 자기관리와 시간 운용, 커리어를 위한 집념을 강조하던 박 교수의 또 다른 면면은 반려견 이야기를 꺼낼 때 비로소 드러났다. 자서전에도 언급된 반려견들, 어린 시절 함께한 ‘메리’와 딸이 대학에 진학하던 시기에 입양한 ‘풉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정의 온도가 달라졌다. 특히 늙고 병들은 메리가 개장수에게 넘겨졌을 때 매일 그곳을 찾아가 생사를 확인하고 울었다는 고백은, 늘 이성적이고 단호한 모습일 것 같은 그의 가슴 한켠에 깊은 연민과 애틋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소중한 인연들
박 교수의 자서전에는 본보 장재민 회장과의 인연도 담겼다. 박 교수는 “UCLA 치대 학장으로 부임한 초기, 가장 큰 과제인 펀드레이징에 조언을 얻기 위해 불쑥 연락을 했는데, 학계 사람이 아닌데도 학교의 재정 상황과 펀드레이징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여러 차례 만남과 대화를 거쳐 이사회 참여를 부탁하니 흔쾌히 수락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장 회장의 도움으로 다양한 인맥이 연결됐고, 그 인연이 내 인생의 또 다른 터닝포인트가 됐다. 지혜로운 친구를 얻어 늘 감사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의 자서전은 현재 한국어 번역이 진행 중이며, 내년 여름 한국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닌, 치의학자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궤적을 담은 인생의 압축이다. 연구실과 강단, 가정과 내면의 갈등 사이에서 스스로의 전환점을 만들어온 박 교수의 기록은, 이민 1세대 지성인이 격동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박 교수의 자서전은 아마존 닷컴에서 구입 가능하며, 킨들 전자책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내년 7월 UCLA에서 마지막 학기를 끝으로 정식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그는 이 책에 대해 “나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는 마무리이자, 다음 세대를 향한 조용한 응원”이라고 말했다. 굽이마다 선택과 책임이 교차했던 그 길 위에서, 박노희 교수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방향을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인생 전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노희 교수 약력
-1944년 충북 단양 출생
-서울대 치대 졸업, 서울대 치의학 석사
-조지아대 이학박사, 하버드대 치의학박사
-1982년 하버드 치대·의대 조교수
-1984년 UCLA 치대 부교수
-1985년 UCLA 치대 정교수
-1998년 UCLA 치대 학장 취임
-2001년 국제치과학 뛰어난 과학자상 수상
-2007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선정
-2009년 UCLA 박노희 석좌교수직 설치
-2010년 치대교육자 가이스 성취상 수상
-2015년 UCLA 치과대 명예동문 수상
-2016년 UCLA 치대 학장 은퇴
-2017년 한국 과학기술유공자 선정
-2022년 어윈 D. 만델 멘토링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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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