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년 동안 미국의 문화예술사업을 지탱해온 국립예술기금(NEA)과 국립인문기금(NEH), 그리고 박물관도서관서비스연구소(IMLS)가 사라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일 공개한 2026예산안은 국방과 국토안보 예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의 지출을 22%(1,630억 달러)나 삭감했는데 여기에 이 기관들의 폐쇄가 포함됐다.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하여 10월부터 시행된다면 미국은 21세기의 ‘암흑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2017년에도 취임하자마자 NEA와 NEH를 제거하려 했으나 의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백악관으로 돌아와서 또 다시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 기관들이 이번에도 의회의 지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데다, 복수를 삶의 미덕으로 여기는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다들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이미 지난 3월부터 많은 문화예술단체들의 지원금이 종료되었다. 일론 머스크의 정부효율부(DOGE)가 모든 기금을 동결시켜버린 탓이다. 가깝게는 라크마(LACMA), 일미박물관(JANM), UCLA파울러 뮤지엄에서부터 미 전국의 수많은 크고 작은 인문예술단체들이 날벼락 같은 그랜트 폐지통보를 받고 망연자실해있는 실정이다.
국립예술기금(NEA)과 국립인문기금(NEH), 박물관도서관서비스연구소(IMLS)는 연방 문화부가 따로 없는 미국에서 예술과 인문학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늘 재정부족에 시달리는 공연단체, 도서관, 박물관들이 어렵게나마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젖줄이었다.
NEA와 NEH는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서명한 ‘국립예술 및 인문재단법’에서 태동됐다. 당시 일단의 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과학과 기술에 중점을 둔 교육만으로는 미국인들이 균형잡힌 삶을 영위할 수 없으므로 문화와 인문학 연구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권고했고, 백악관과 의회가 이를 받아들여 법제화한 것이다. 백악관의 로즈가든에서 열린 이 법안의 서명식에는 200여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축하했으며 배우 그레고리 펙,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 작가 랠프 엘리슨,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등이 참석했다고 기록돼있다.
이 법에 따라 나란히 창설된 두 기관이 예술을 살리는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와 인문학을 중시하는 NEH(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로서, 워싱턴포스트는 이 사건을 “미국 문화의 이정표적 진일보”라고 보도했다.
이후 지난 60년 동안 NEA와 NEH는 전국 50개주의 모든 지역사회에서 예술단체들을 지원하며 미국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음악, 미술, 춤, 디자인, 공예, 오페라, 시각예술 등의 교육과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NEA는 2024년 한 해 동안에만 1억6,300만달러의 그랜트를 수천 개의 단체들에게 지급했다. 각 액수는 1만~10만 달러로 크지 않고, 작은 단체일수록 그 지원금이 예산의 거의 전부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적은 액수라도 NEA 기금을 받으면 개인과 업체의 후원도 늘어나기 때문에 많은 단체들이 그랜트를 받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
NEH의 경우, 지원 대상은 뮤지엄, 아카이브, 도서관, 대학, 학자들이다. 1965년 창설된 이후 무려 7만 여개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 기금으로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책을 출판했는데, 그렇게 나온 9,000권 중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책이 20권이나 된다.
한편 1996년 창설된 박물관도서관서비스연구소(IMLS)는 예산이 연 2억9,000만 달러로 NEA나 NEH보다 규모가 큰 연방기관이다. 각 주의 도서관과 뮤지엄들의 펀딩을 통해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미래 세대의 정보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들을 하는 세 기관의 예산은 여타 연방부서들에 비해 턱없이 적다. 예를 들어 NEH의 연 예산 2억달러는 연방예산(6조8,000억달러)의 0.0029% 밖에 안 된다. 그걸 절약하기 위해 미국사회와 다음 세대가 치러야할 대가는 얼마나 큰가.
트럼프가 문화예술을 싫어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화예술인들도 트럼프를 싫어한다.) 두 달 전 그가 케네디센터의 이사장으로 ‘셀프취임’ 한 것은 공연예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첫 임기 때 이 기관과 불화했던 사건의 보복이라고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또 트럼프는 취임 첫날 ‘대통령 예술인권위원회’를 해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레이건 대통령 때 창설된 이 위원회는 예술과 인권 문제에 관해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단체인데 2017년 트럼프가 없애버렸으나 2022년 바이든 대통령이 복원시켰고 다시 이번에 해체되는 파란과 곡절을 겪었다.
트럼프는 왜 그렇게 문화예술을 싫어할까? 모든 독재자는 예술가들을 핍박한다. 비판을 싫어하는데다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틀에 갇히기 싫어한다. 따라서 독재자들이 척결대상 1호로 삼는 것이 생각과 표현의 자유, 하지만 아무리 찍어 눌러도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독재는 짧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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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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