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벽두부터 LA를 휩쓸고 있는 엄청난 화마로 걱정과 불안이 그치지 않는다. 직간접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시각각 뉴스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사상 유례없는 비극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있다.
14일 현재 25명이 숨지고 1만2,000여 채의 집과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또 하나 가슴 쓸어내리는 소식이 지난 주말 전해졌다. 미 서부지역 최대의 명소인 게티 센터(Getty Center)가 강제대피 구역에 포함됐다는 것이다. ‘팰리세이즈 산불’이 해변 주택가를 초토화시킨 후 내륙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게티 센터와 브렌트우드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불 초기에는 말리부에 있는 게티 빌라(Getty Villa)에도 불똥이 튀어 정원과 일부 시설이 불타는 피해를 입었으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산불, 지진, 홍수, 전쟁 등 재난에 의한 손실은 개인들의 피해도 가슴 아프지만 문화유산과 예술품의 경우 한번 잃으면 복구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비극적이다. 2018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립박물관의 화재가 좋은 예다. 그 화재로 소장품 2,000만 점이 대부분 소실됐는데 여기에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고대 유물과 화석, 운석, 미라 등이 포함돼있었다고 한다. 2015년 러시아에서는 사회과학학술정보연구소 도서관에 불이 나면서 수백년 된 기록과 문서, 희귀도서 등 200만여 권이 훼손되기도 했다.
만일 팰리세이즈 산불이 게티 센터로 번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름다운 건축물과 정원, 10만 점이 넘는 귀중한 예술품들을 잃게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셔도 될 것 같다. 산타모니카 산 정상에 자리잡은 게티 센터는 건축물의 내부와 외부는 물론 110에이커에 달하는 부지 전체가 방재 시스템을 완벽하게 탑재하고 있다.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10년 넘게 공들여 지으면서 산불 등 화재에 끄떡없이 견딜 수 있도록 돌과 강철, 콘크리트로 설계한 덕분이다.
지붕은 모두 내화성 쇄석골재로 덮었고, 건물 외벽과 바닥은 석회암의 일종인 두툼한 트래버틴을 사용했으며, 강화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 내벽은 자동 방화벽 기능을 갖추고 있어서 불이 나면 자동 차단되면서 어느 곳으로도 번지지 못하게 막는다. 또 건물들 주변의 광장들은 불이 쉽게 번지지 않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뮤지엄 내부엔 탄소필터 에어컨디셔닝 시스템이 장착돼있다. 비상 시 공기 흐름을 역류시켜 외부에서 연기나 재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밀려나가도록 하는 밀폐기능이다. 물론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도 설치돼있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으로 작동하게 된다. 물은 소장품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경과 관개시설 또한 놀랍다. 설치작가 로버트 어윈이 설계한 게티의 정원은 건축물 가까운 곳에는 수분을 많이 함유하여 내화성이 강한 아카시아 관목이 심겨져있고, 조금 떨어진 곳은 가뭄을 잘 견디는 식물과 참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연중 세심하게 관리되어 불씨가 될 수 있는 관목과 가지들을 미리미리 쳐낸다. 중앙 가든은 물을 항상 많이 대는 잔디와 관개 시스템으로 둘러싸여 화재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또 게티의 주차장 지하에는 100만 갤런의 물탱크가 있고, 관개 파이프들이 지하 네트워크로 연결돼있어 불이 나면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면서 땅을 미리 적시게 된다. 게티 센터는 2017년 ‘스커볼 파이어’와 2019년 ‘게티 파이어’ 때도 큰 산불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 스커볼 파이어 때는 잉걸불이 게티 산언덕까지 날아와 발화가 시작됐지만 곧 꺼져버렸고, 게티 파이어는 인근 숲을 600에이커나 태웠지만 게티 센터에는 다가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방재시스템이 작동하여 땅이 온통 젖어있던 탓에 불이 번지지 못한 것이다.
이쯤 되면 “게티 센터는 불이 났을 때 예술품을 보관하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건축가 마이어의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의 중요한 박물관들은 대부분 이처럼 소장품을 보호하기 위한 철저한 방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뮤지엄은 수만에서 수백만 점에 이르는 유물과 예술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특수 시설이기 때문에 유물들을 적절하게 보관할 수 있는 온도, 습도, 조명은 기본이고 대기오염, 화재, 인위적 파손 등의 손상요인을 최소화하기 위해 첨단공법을 사용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 소장품의 재료에 따라 환경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일도 필수다. 회화와 종이, 사진, 목제품, 도자기, 토기, 금속, 석재, 유리, 직물 및 텍스타일 등의 민감도가 모두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게티 센터를 방문할 때마다 그 멋진 건축물과 시원한 전망, 아름다운 정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곤 했는데, 그 시설과 조경이 단지 관상용이 아니라 세심하게 계획되고 조율된 방재 시스템의 일부였다니 경이를 금할 수 없다. 부디 게티 센터와 우리 모두가 LA에 찾아온 최악의 재난으로부터 무사하고 건재하기만을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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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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