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백지간, 산사람들이 백두대간 산줄기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경북 영주에서 충북 단양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라면 죽령을 먼저 떠올릴 텐데, 그 동쪽에도 고치령과 마구령이 있다. 옛사람이 걸어 넘던 길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어져‘영단로’‘영부로’라는 명칭까지 부여됐다. ‘영주 단산면’과 ‘영주 부석면’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마구령 길은 지난 5월 고개 아래에 터널이 뚫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고치령은 여전히 차량이 운행한다. 그 산줄기 아래에 영주가 자랑하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있다.
■고치령, 금성대군도 이 길을 넘었을까
고치령(770m)은 단산면 마락리와 좌석리를 잇는 고개다. 신라시대에 고개 아래에 대궐을 짓기 위해 터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옛 고개’가 변형돼 ‘고치재’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고개 서쪽으로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등 소백산 고봉이 이어진다.
고갯마루 남서쪽에서 연결되는 영단로는 막다른 길처럼 느껴진다. 우람산 산줄기가 수면에 비치는 단산저수지를 지나면 옹색한 계곡에 자리 잡은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좌석리 마을을 통과하면 중앙선도 없는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도로 폭은 차량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여서 정식 도로가 맞나 싶을 정도다.
국망봉 11.1km, 마구령 8km 등산로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도로 한편에 자그마한 성황당 건물이 보인다. 네 기둥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문이 겨우 열리는데, 내부에 ‘태백산신위’ ‘소백산신위’ 위패와 함께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백마를 탄 단종에게 추익한이 산머루를 바치는 장면이다.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목숨을 잃은 단종은 무수한 애사의 주인공으로 부활한다. 성황당의 그림도 그중 하나를 묘사하고 있다.
추익한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하루는 꿈에 머루와 다래를 따서 단종을 만나러 가던 중 곤룡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행차하는 단종을 보았다.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추익한이 급히 영월로 갔을 때는 이미 승하한 뒤였다. 태백산 성황신은 바로 단종이다.
소백산 성황신은 삼촌 금성대군이다. 형님 세조의 왕권 찬탈에 반대하다 영주 순흥으로 유배됐고, 그곳에서 지역 유생을 모아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끝내 처형당했다. 고치령에는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이 영월에 기거하던 단종을 만나기 위해 넘던 고개라는 이야기가 더해졌다.
고갯마루 바로 아래 여우샘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차를 몰면 마락리다. 이곳에도 단종의 전설이 남아 있다. 금성대군과 단종 사이를 왕래하던 밀사가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마락’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마락리를 벗어나면 단양 영춘면, 거기에서 또 조금만 가면 영월 김삿갓면이다. 경북, 충북, 강원 3개 도를 넘나드는 곳이다. 영춘면에서 28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 다시 영주 부석면이다.
마구령(820m)은 오래전부터 단양 영춘면 주민들이 영주 부석장에 가기 위해 넘던 고개다. 장사꾼들이 말을 타고 다녔던 고개라 마구령이고, 김을 매는 것처럼 힘든 고개여서 매기재라고도 불린다. 수많은 민중의 애환이 깃들어 있을 마구령 길은 이제 걸어서도 갈 수 없다. 마구령터널 건설 이후 소백산국립공원은 마구령 옛길의 포장을 벗겨내고 자연 복원 중이다.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 맛집’ 부석사
마구령터널을 나와 바로 동편 산중턱에 부석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했다고 하니 무려 1,400년 가까이 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떠난 의상, 그를 흠모하다 용으로 변한 여인 선묘, 도둑 소굴을 소탕하고 절을 짓게 도운 용의 전설은 서산 부석사 창건 설화와 꼭 닮았다.
불자가 아닌 여행객 입장에서 부석사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풍경 맛집’으로 평가된다. 무량수전 마당에 서면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산줄기, 거리에 따라 명암을 달리하며 너울거리는 백두대간 능선에 가슴이 뭉클하다.
영주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찍어 주는 ‘뷰포인트’와 사진 명당도 흥미롭다. 주차장에서 약 700m, 설렁설렁 걸어 10여 분이면 천왕문에 닿는다. 절간으로 들어서며 정면으로 보이는 범종루도 우아하지만 뒤로 돌아보면 아름드리 나무 위로 걸리는 소백산 능선이 일품이다.
천왕문에서 길은 곧장 범종루로 이어지지만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서서 봐야 할 풍경이 있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 처마 아래에 다섯 부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실제 부처상이 아니라 장식 기둥 사이로 주황색 무량수전 벽면이 걸린 모양이다. 오른쪽 보장각 마당에서 바라보면 안양루가 무량수전에 꼭 안긴 것처럼 보인다.
사찰의 중심 범종루에는 태백산도 소백산도 아닌 ‘봉황산 부석사’ 현판이 걸려 있다. 무량수전 바로 뒤편 봉우리인데, 이곳에서 날린 봉황이 앉은 자리가 안동 봉정사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범종루 아래에서 돌계단을 올려다보면 코앞의 안양루가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안양은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 불국정토의 다른 이름이다. 원근감을 극대화해 극락세계의 느낌을 살렸다는 평이다.
건축의 마법은 계속 이어진다. 안양루 아래에서 돌계단을 올려다보면 무량수전 앞 석등이 중앙이 아니라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방문객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유도해 무량수전 왼편에 모셔진 불상을 알현하게 한 구조다. 실제 마당에 올라서면 석등은 건물 중앙에 위치해 있다. 석등 사이로 ‘무량수전’ 현판이 절묘하게 보이도록 배치한 것도 이 절의 묘미다.
굳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지 않아도 바라보는 풍광은 더할 나위가 없다. 전각 오른쪽 삼층석탑은 특히 노을 명당으로 꼽히는데 멀리 산자락과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괜히 무량수전일까. 부처의 품처럼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삼층석탑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조사당이다. 처마 아래에 나뭇가지가 우아하게 늘어져 있다.
부석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임금이 최초로 이름을 지어 내린 소수서원이 있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고, 이듬해 유생들을 교육하며 백운동서원이라 했다. 명종 5년(1550)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소수서원’ 사액을 받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 숙소이자 공부방인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 건축의 틀이 잡힌 후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동·서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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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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