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박준환 사우수배일로 대학 이사장
1978년 한의사 1차 진료자 가주법안통과 앞장, 사우수배일로 한의과 대학통해 숱한 한의사양성…한얼연구소설립, 한국의 역사&사상을 직접 교수
▶ 우수를 생각하며 한길로 끊임없이 정진, 사우수배일로 대학 이념담아 교육 실천
고 박준환 사우수배일로 대학 이사장은 미국 대학에서 30여년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77년 사우수 배일로 한의대를 설립하고 한얼연구소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정립한 교수이자, 사상가로 다채로운 팔색조의 삶을 살았다.
사우수배일로 한의과 대학을 설립한 박준환 이사장이 지난 2020년 12월20일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서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박준환 이사장은 한국에서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후 유학와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30여년간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77년 한의대를 설립해 40여년이 넘게 운영하면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한얼연구소를 설립한 교수이자, 사업가이자, 사상가로 다채로운 팔색조의 삶을 살았다.
박이사장은 지난 1930년 8월7일 대구의 한 시골마을에서 박태현씨와 장소연씨의 5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삼형제와 여동생 둘이 있었다. 아버지는 엄하고 말이 없는 분이었지만 어머니는 자상하고 사교성이 뛰어나서 온 동네의 큰 언니 같았다. 어떤 사람이든지 나이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머니를 믿고 따르고 좋아했다. 그렇게 인기 있고 사랑받던 모친은 1946년 위암으로 별세했다. 부친 박태현씨는 연희전문 상과 졸업후 일제시대 대구동산병원을 설립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해 병원에서 사임하고 충청도로 피신했다가 해방후 대구로 돌아왔다. 해방 후 부친은 경상도 군수와 부산시 부시장, 칠곡 군수 등을 지내며 한동안 정계에 몸담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완전히 정계를 떠났다. 그후 신학을 공부한 후 개척교회를 세웠고 목회자가 없는 어려운 교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다가 80세에 별세했다.
대구 달성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후 계성고등학교를 다닐 때 박이사장의 꿈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부친이 3.1만세 운동 때 옥고를 치뤘고 태평양 전쟁당시 신사참부를 거부하는 등 애국자로 살았기에 그는 한국을 큰 나라로 만들어 하루빨리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그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계성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50년 6월초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6.25전쟁의 발발로 육군통역장교로 복무하면서 부산 영도 임시캠퍼스에서 학창생활을 마쳤다.
박준환 이사장은 1955년 전후 대한민국의 재건에 가장 중요한 경제를 공부하기 위해 도미해 클레어몬트 대학에 등록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1962년 USC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부터 1996년까지 메릴랜드 대학과 칼폴리 포모나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수리경제학과 노동경제학을 가르치던 그가 미국 내 60여개 한의대 가운데 가장 큰 사우수배일로 유니버시티를 설립한 것은 1960년대 미국이 극도의 혼란 속에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고민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특히 1972년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면서 미국에 한의학이 들어오고 그 해 가주에서 한의학에 대한 법령과 침구에 대한 법령이 제정된 데 이어 1975년 7월 주지사의 명으로 한의학 자문위원회가 발족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이 우리 문화와 비슷한 점이 많고 그것이 바로 실천학문으로서의 한방과 가장 밀접하다는 생각에 우리 문화의 정신세계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하는 한의대를 설립했다.
1977년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의과대학을 만들면서 어떤 이름을 지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사우수배일로 대학(South Baylo University)이라고 명명했다. 사우수배일로가 영어이름인 줄 아는데 사실은 순수한 한자어로서 “항상 우수를 생각하며 한길로 끊임없이 정진한다”(思優秀 倍一路)는 뜻이다. 그 이름 속에는 박이사장이 만들고 싶었던 학교의 이념이 그대로 들어있다. 가장 우수한 것, 최고의 가치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일이야말로 학문에서나 의술에서나 일상의 삶에서나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장 바람직한 정신이라고 믿었다. 또한 40여년이 넘게 석사와 박사과정을 영어, 한국어, 중국어의 3개 언어로 가르치면서 사우수배일로 대학을 한의대의 대명사로 불리울만큼 성장시켜 ‘한의학의 대부’라는 명성을 얻었다.
김용석 침뜸병원의 김용석 원장은 “1978년 한의사를 1차 진료자로 허용하는 법안이 가주의회에서 통과되도록 하는 데 박준환 사우수배일로 대학 이사장의 헌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즉 1970년대만 해도 가주에서는 의사의 소견이 있어야 한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박준환 이사장이 당시 사우수배일로 한의대 학생들과 함께 타 커뮤니티의 한의사들이 힘을 함쳐 새크라멘토 주의사당까지 올라가 시위를 벌이는 등 법안통과 캠페인을 펼쳤기에 한의사들의 법적지위가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박준환 이사장은 1997년 한의대와 분리해 캘리포니아 경영과학대학(캘리포니아 유니버시티 오브 매니지먼트 앤드 사이언스:CalUMS)을 설립했다. 그는 칼폴리 대학 은퇴후 사우수배일로 총장으로 10년간 일하며 한의대를 충분히 키운후 2007년 이사장으로 물러나면서 CalUMS 경영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경영대학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현재 애나하임 본교에 500명, 버지니아 분교에 1,000명 가까이 커지면서 한의대 규모를 앞지르고 있다.
그는 사우수배일로 한의과대학(SBU) 안에 ‘한얼 연구소’(Han Spirit Institute)라는 연구기관을 설치했다. 한국의 역사와 사상, 얼과 문화를 연구하고 바로 알리는 기관으로 1997년 ‘한사상 연구소’(Han Research Center)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기관은 2014년 세대교체와 더불어 ‘한얼 연구소’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한얼 펴기 운동’의 전개를 위해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한얼 연구소’는 박이사장의 오랜 꿈과 염원, 궁극의 사명이 담긴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실제로 SBU에서는 지금도 한국의 사상과 한국 역사를 주요 커리큘럼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이 다른 한의과대학과 차별화되는 점이며 자신이 꽤 오랫동안 한국사상을 직접 강의했다.
그 와중에도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1967~1968년에 2대 남가주연세대 동문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마서준 23대 남가주연세대 동문회장은 “박이사장은 연세대 동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국제재단 이사장으로 본교에 100만달러의 발전기금을 보내는 일을 한 것은 물론 LA 연세어학당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후원했다”고 밝혔다.
고 박준환 이사장의 유족으로 사우수배일로 대학 공동설립자인 부인 박은희 SBU 해외담당이사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연세대 동문인 큰 아들 아서 박(산부인과 의사) 외 1남 2녀, 4명의 손자가 있다. 고 박준환 이사장의 장례식은 오는 19일 오후2시30분, 글렌데일 포리스트 론(1712 S. Glendale Ave)의 Church of the recessional에서 정요한 목사 집례로 열리며 하관식은 1월 21일 오후 3시, 글렌데일 포리스트론에서 있게된다. 연락처 (714)533-1495, (213)738-0712
<
박흥률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