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고· 서울미대 졸업후 도미, 오티스 미대 졸업…추상화와 입체작품 등 한국과 미국 화단서 활동
▶ 미협회장으로 커뮤니티와 함께 하는 작가정신 실천
박영국 전 남가주 한인미술가협회장은 사망 몇 주전까지도 시니어 커뮤니티 센터에서 시니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생은 뛰어난 화가이자 논리정연한 사고방식에 정리정돈을 깨끗이 하면서 반듯한 예의범절 그리고 남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선비였습니다”
지난 11월30일 74세의 나이에 암으로 별세한 박영국 전 남가주 한인미술가협회장의 큰 누이 박영신씨는 “수채화, 입체화, 스케치 등 다양한 작품을 혼신의 힘을 쏟아 열정적으로 스튜디오에서 평생 죽는 날까지 그리다 숨진 동생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회한에 남는다”고 아쉬워했다.
박영국 전 남가주 한인미술가협회장은 사망하기 2주전, 후배에게 작품 아이디어와 색상이 머리에 막 떠오르는데 빨리 대작을 그리고 싶다는 유언아닌 유언을 남겼다. 남가주 한인미술가협회장을 지난 2012~2013년에 역임한 서양화가 박영국씨는 남가주 한인화단 1세대의 대표주자로 평가되고 있다. 1970~80년대, 척박하지만 꿈이 있었고 무공해 열정과 예술이 타오르던 한인이민 초창기를 풍미한 원로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946년 8월6일 서울에서 부친 박용호씨와 모친 김아가다씨의 3남1녀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후 서울미술대학 회화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잠시 덕성여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다. 지난 1975년 서울에서 부인 정승희(2017년 작고)씨를 만나 결혼했으며 슬하에 신시아, 프랜시스, 조앤 등 세 자매를 두었다. 1976년 유학생으로 도미해 ‘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in Los Angeles’ 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박씨는 이후 생계를 위해 페인팅, 인쇄업, 메일링서비스, 인쇄업체 등 다양한 비즈니스를 운영했지만 순수한 스타일의 그에게 비즈니스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1990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서울대·중앙대 등 여러 대학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한편으론 그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들을 한국 미술계에 전달하는 일에 힘썼다. 1998년 한국의 금호 미술관에서 ‘사막일지’라는 주제의 전람회를 열었다. 높이 2m49㎝의 ‘사막 호텔’이라는 작품을 전시해서 눈길을 끌었는 데 당시 동아일보는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는 사막에서 생존의 본질적 동태를 읽는다. 사막은 생존의 한계 상황. 존재하려면 그악스러워야 한다.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생명의 환희는 커진다. 사막에서 사물은 강인하고 화려하게 존재한다. 널빤지와 나무 막대기의 조합으로 이뤄진 창과 문, 계단. 그리고 옅은 색채…. 작가는 제목에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20대 후반 낯선 사막에서 불현 듯 화심을 느껴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서 미국의 발전된 예술에 대한 많은 강연회와 전람회를 개최하고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고 애썼지만 한국 사회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LA로 돌아왔다
LA로 돌아와서는 좀 더 넓게 거리를 두고 현대문명과 미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열정만 가득했던 시기에는 현대미술을 신격화하여 비판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았지만 한 발 물러나서 보니 현대미술의 불합리성과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에서 깊은 인간성 결여를 느낀 그는 변화를 추구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이 캘리포니아의 자연풍경에 영감을 얻어 기하학적이고 조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시각적인 LA’였다면 LA에 재정착 후 그의 작품은 깊숙하고 내적인 삶의 장소로 재조명된 ‘정신적인 LA’로 변화됐다.
그는 2012년 남가주 한인미술가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미술가협회의 변화도 역설했다.
당시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미협은 한인회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졌으니 싫든 좋든 커뮤니티의 재산이고, 커뮤니티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철학을 정확하게 세우고 자리를 정확하게 잡아야 한다는 것이죠”라며 “예술가가 자기 골방에서만 작업하기보다 방에서 튀어나와 커뮤니티와 함께 숨쉬며 사회에 눈길을 주는 작가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3년 한국문화원에서 남가주 한인미술가협회 창립 45주년 특별 회원전을 열어 회화·조각·설치 미술 등 분야에서 57명 회원, 60여점을 선보이는 등 후배들의 권익을 도모하고 재능있는 한인 미술학도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또한 한인타운 시니어 커뮤니티 센터에서 미술교실을 맡아 한인 시니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등 활발한 재능 기부활동을 시작했다. 강사료는 물론 거마비조차 없는 무보수로 결강 한 번없이 강의를 했다. 수강생은 20~30여명으로 주로 60~70대가 주를 이루었다. 그는 수업 중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수강생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시도해 자연스레 미술심리 치료 효과까지 생겼다고 한다. 데생, 수채화, 유화, 아크릴까지 다양하게 진행되고 LA카운티미술관이나 게티센터를 견학해 미술을 보는 안목도 넓히게 했다. 또한 수강생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큰 누이 박영신씨는 “시니어 커뮤니티센터 수강생들에게 미술공부뿐만 아니라 인생상담도 하고 가족처럼 지내왔기 때문에 동생을 그리워하며 눈물짖는 수강생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유가족들은 코로나 19사태가 종료된 후에 박영국 화백 추모작품전을 열 예정이다.
박영국 전 미술가협회장과 경기고등학교, 서울대 미대 동기인 윤시중 전 김스전기 부사장은 “박화백은 추상화와 입체작품 등으로 한국화단과 미국화단에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며 “그의 작품세계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밝혔다.
고 박영국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장의 유족으로 3년전에 작고한 부인 정승희씨와 신시아, 프랜시스, 조앤 등 3녀, 손자 1명, 손녀 2명과 큰 누이 영신, 남동생 건, 영환씨 등이 있으며 장례식은 지난 19일 컬버시티의 홀리크로스 장의사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추상화와 입체작품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박영국 전 남가주 한인미술가협회장은 작품활동뿐만 아니라 시니어 커뮤니티센터에서 재능기부로 60~70대 한인들에게 미술교습과 인생상담을 병행하면서 커뮤니티와 함께 하는 작가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녀 조앤 조사>
Dad’s English name and baptism name is Peter. Named after the disciple Peter who Jesus deemed the “rock I will build my church.” That’s what he was: dad was the rock of our family. The leader of our family. As the rock and pillar of our family, he taught us the value of passion, truth, kindness, the value of family and love. Some of the lessons he taught us daughters throughout our lives:
“Think before you do”
“Always Leave 1 spoonful of food on your plate”
“Read lots of books”
“Elevate your consciousness”
He also taught us the value of showing affection: we would sit on the couch with our dad and he would always hold our hand. Just watching tv and holding hands. our dad taught us the importance of showing our love: That’s why each of us, his daughters are such big huggers. Even in his last moments here on Earth, we each hugged him and held his hands. Appa, We will do our best to live our lives with the values you taught us and with the love you gave.
Our dad was not only the rock and leader of our family. His leadership and influence went beyond just us. He was also a leader in the many communities he served. He served as a leader in the korean art community, in the korean catholic community, in his alumni community, and in the korean senior center community. In his last days, Dad thought a lot about the legacy that he would leave behind. His legacy as an artist, his legacy as a friend, his legacy as a father. He leaves behind a large body of art work: his signature wooden pieces; his art themes that include the California desert, the Los Angeles city landscape; his use of mixed media; and his vibrant colorful art pieces.
But I now understand that the true legacy he leaves behind, is the impression he left on all of us. The many conversations HE had with each of us. The discussions we EACH had with him about art, philosophy, history, language, communication, culture, faith, family, and passion.
Dad, Peter, the rock: he is leaving his mark on the world. With his legacy, the world is more colorful, more cultured, more kind, more conscious, the world is more loved.
<
박흥률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