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룡 전 6.25 참전유공자회 미서부지회 회장
▶ 한국현대사 고비고비마다 군인으로 애국, 미보병학교서 박정희 전대통령 훈련동기…자녀들에게 다정다감, 형제간에 우애강조
한국전과 월남전을 누비면서 숱한 전공을 세운 김해룡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미서부지회 회장은 “가족들에게는 한없이 다정다감한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항상 가화만사성을 강조했다”고 유가족측은 회고했다.
“부친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월남전을 거치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여정에서 군인으로서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충정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지난 10월1일 89세의 나이에 LA자택에서 별세한 고 김해룡(사진)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미서부지회 회장의 장남 김대재씨는 “자녀들에게 친구처럼 항상 다정하게 대해주시고 형제간의 우애를 특히 강조해 가화만사성을 가훈으로 삼으셨다”고 회고했다. 김해룡 회장은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영향인지 몰라도 가족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우애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
김해룡 회장은 지난 1931년 2월18일 부친 김영수씨와 모친 권춘의씨의 4남5녀 중 장남으로 일본 동경에서 출생했다. 부친 김영수씨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금속관련 비즈니스를 운영했으며 일본에서 터전을 잡고 생활하다가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경상북도 대구에 정착했다. 김해룡 회장은 태어나서 초중학교 시절을 줄곳 일본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어 구사에 서툴렀다고 한다.
그는 1950년 대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에 입학한 1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해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가 수개월간의 단기 군사교육을 마쳤다.
이후 전시종합학교 29기로 임관해 1951년 소위로 전선에 배치되었다. 공산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한 번은 철제 혁대 부위에 총알이 날아들어 생명이 위험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고 한다. 6.25전쟁중 펼쳐진 한 고지탈환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 7명을 생포한 전공으로 후에 충무무공 훈장을 받았다. 1953년 제5차 국군장교단 도미 유학생에 뽑혀 6개월간 미국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의 보병학교에서 선진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장교로 함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6.25전쟁이 끝난 후 강원도에서 중위로 근무하다 군수품 조달을 위해 1956년 원주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던 한 상인을 만나게 되었는 데 바로 지물포집 딸이 현재의 부인 김상희씨이다. 김회장은 상희씨와 1년여 사귄후 결혼해 2남3녀의 자녀를 낳았다. 이후 1963년 홍익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1966년에는 육군 제 12사단 51연대 대대장으로 승진했다.
1969년에 백마부대 30연대 대대장으로 6.25전쟁에 이어 한국이 경험한 대규모 전쟁인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월남에서도 캄남베이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게되었다.
1970년 홍익대학교 학군단 단장으로 근무할 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장남 김대재씨는 “부친이 한번은 자녀들에게 태권도 3단이라고 자랑을 하면서 소갈비를 맨손으로 자를 수 있다고 시범을 보이다가 손에 부상을 입어 10일간 손에 붕대를 감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고 웃음지었다. 평생을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앞장서온 부친이 사실은 굉장히 다정다감하고 친구같이 격의없이 자녀들을 대했다고 김대재씨는 회고했다.
1973년 고려대학교 학군단장을 지내면서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그해에 육군중령으로 예편했다.
1977년 단신으로 남미 볼리비아로 이민간 후 1979년11월25일 서울의 가족들을 불러들여 볼리비아에서 합류했다. 볼리비아에서 제 10대 교민회장을 역임했으며 그곳에서 제1,2기 평통위원(4년)을 지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잠시 거주했다가 1990년 미국으로 가족이민온 김해룡 회장은 잠시 봉제업에 손댔다가 원단회사에서 근무하는 등 7년을 의류관련 업종에 종사하다가 1990년대 말에 은퇴했다. 이후 재향군인회와 국가보훈단체 등에서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2007년 6.25참전 용사 모국방문단 인솔단장으로 활약했고 2007~2009년에 재미월남참전 총연합회 제3,4대 회장을 역임했다. 2008년 10월3일~10월2일 한국 및 베트남 전적지 시찰 방문단을 결성해 인솔했으며 2008년 11월21일 미서부 재향군인회 감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2011년 1월27일 사단법인 사단법인 한미친선 미서부 지역회장에 취임했다.
2007년 10월8일 재향군인회장(박세직)공로패, 2009년 3월9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공로휘장을 수상했다. 2018년 6.25 참전유공자회 미서부 지회 제4대회장에 취임해 이 단체를 이끌어왔다.
장남 김대재씨는 부친이 임종하면서 “너희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다. 웃으며 떠나겠다. 웃으며 보내달라”고 자녀들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또한 전우들에게는 모두 건강하라고 이야기한 후 남북통일 만세 삼창을 하고 박수치면서 ‘Everybody Goodbye’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지난 10월9일 주님의 충신교회 이종길 담임목사의 집례로 한국장의사에서 거행된 김해룡 회장의 장례식에는 박경재 LA총영사가 조사를 보내왔고 최만규 육군동지회 회장이 진행을 했으며 수많은 보훈단체의 임원들이 참석했다. 김해룡 회장의 유가족으로 부인 김상희 권사, 장남 대재, 차남 동섭, 장녀 영주, 차녀 진주, 삼녀 희주씨 등 2남3녀, 7명의 손자, 6명의 손녀 등이 있다.
조사- 조카 서희경(시애틀 거주)외삼촌은 웃으면서 보내달라고 유언하셨어요. 참 멋이 있는 마무리! 우리 외삼촌은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시네요. 너무 아까우신 분. 하늘에서도 꼬옥 필요한 사람이라 불러가시나 봅니다.
이 저녁에 입을 꼬옥 다무시고 바지 날선 줄 다리미질 하시는 외삼촌의 모습. 아침마다 포마드를 바르시고 “희경아, 맥도널드에 아침 먹으로 가자” 하시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는 생생하네요. 우리 외삼촌, 겉으로는 참 무뚝뚝해 보여도 (그리고 또 그리 말씀을 하시지만) 속은 한없이 다정하신. 외숙모가 말많이 한다고 앞에서는 면박을 주시는 것처럼 하셔도. 얼마나 다정한 남편 이라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이런 외삼촌이 이제 안 계시다는 사실이 저를 무척 슬프게 하네요. 제가 외삼촌께 당부 한 것이.. “삼촌이 계시니 그나마 희경이가 LA다녀가도 들러 볼 댁이 있잖아요. 삼촌 안계시면 저는 너무 외로울 듯. 오래 사세요” 라고 당부 해 드리니 “그래 오냐 .. 니 생각해서라도 오래 오래 산다. 내가 광희(울 엄마) 생각해서라도 오래 살아야지” 하신 분인데 ..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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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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