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선 전 LA한인회장&제너럴 머니오더사 대표
▶ 여러 개의 마켓운영 토대로 한인최초 머니오더사 설립,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독재정권대항 민주화 운동 도와…부인과 한 차례 만남을 태평양 건넌 사랑으로 꽃피워
고 황제선 전 LA한인회장은 제너럴 머니오더를 설립해 가주에서 2위에 랭크될 정도로 성장시켰으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평생 헌신했다고 유가족측은 회고 했다.
“남편은 이역만리 미국 땅에 와서도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머니오더 비즈니스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10월18일 84세의 나이에 별세한 황제선(사진) 전 LA한인회장의 부인 황태순 권사는 “특히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사재를 털어서라도 도와줄 정도로 동정심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황제선 전 LA한인회장은 지난 1936년 6월8일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삼당리에서 출생했다. 이후 성균관대 상대를 졸업후 1964년 청운의 꿈을 품고 도미해 웨스트 코스트 대학에서 전자공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황회장은 1964년 미국에 건너오기 두 달여전 한국에서 잠시 일했던 미8군 병원에서 간호사로 첫 근무를 시작하면서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던 부인 태순씨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스치듯 지나간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이것이 태평양을 건너는 사랑의 전주곡이 될 줄은 당시만 해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간 황회장은 한국에 있던 태순씨를 잊지 못해 2년간 서로 편지로 안부를 물어보면서 두 사람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갔다. 황회장은 1967년 2월28일 한국에 돌아와 태순씨와 그 다음날 바로 약혼을 하고 5일만인 1967년 3월5일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황회장 부부는 이해 4월20일 도미해 LA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태순씨는 호손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1년여 일하면서 미국생활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으며 황회장도 일단 직장생활을 하면서 기반을 잡았다.
1960년대 후반은 가발 비즈니스가 붐을 이룰 시기였다. 황회장 부부도 당시 가발 비즈니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LA지역에서의 가발 비즈니스가 너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또 다른 기회를 찾아 1970년대 초반 지인의 소개로 시카고로 이주해 가발 비즈니스를 운영했다. 그러나 시카고에서의 비즈니스도 경쟁이 치열하기는 매한가지. 밀워키로 다시 거주지를 옮겨 열심히 일하면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지만 추운 날씨가 싫어서 다시 1974년 LA로 돌아오게 됐다. 7년간 미국 생활을 통해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황회장 부부는 1974년 다시 LA에서 마켓 운영을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않고 일하면서 중형 마켓을 4개 정도 사고팔고 하면서 운영규모를 늘리는 가운데 한인 리커들이 첵캐싱 수요가 크다는 점을 착안해 1983년 제너럴 머니오더사를 설립했다. 황회장은 첵캐싱을 위해 은행을 방문하면서 주차장에서 은행 강도를 만나기도 하는 등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생명을 잃을 뻔한 순간을 수 차례 경험하기도 했다.
이후 제너럴 머니오더사는 한인리커들을 대상으로 첵캐싱 시장을 크게 확장했으며 1991년 문을 닫을 때까지 연매출 6,000만달러로 캘리포니아주 전체에서 2위를 랭크할 정도였다.
한인사회 봉사에도 열심이었던 황회장은 1989년 7월 간접선거로 치러진 19대 LA한인회장선거에서 19대 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주지역 최측근 인사로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한인사회에서도 의리있고 경우가 바른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무난히 한인회장에 당선되었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그는 1984년 재미인권문제연구소 중앙이사 및 김대중 전 대통령 미주후원회 회장을 시작으로 1997년 제15대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해외특보를 지내는 등 평생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미주지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LA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다. 황제선 회장은 1984년 4월22일 LA영빈관에서 당시 ‘민족의 한을 품고’ 김대중 선생 저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1985년 2월8일 미국 망명 2년1개월 남짓 만에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귀국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여전에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다 암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등 당시 김 전대통령의 안전도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황회장은 김 전대통령과 함께 동행했다.
황회장의 장녀 쌜리 황씨는 “아빠가 압제와 독재에 항거해 투쟁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며 “불의를 관용하지 않는 정신을 아빠를 통해 배웠다”고 밝혔다. 그녀는 UC버클리 재학시 1987년 6월 한국의 민주화 항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대학을 한 학기 휴학하고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서울 올림픽의 자원 봉사자로 일할 정도로 조국애가 뜨거웠다.
황회장의 부인 황태순 권사는 “건강했던 남편이 1993년 심장에 이상이 와 심장이식수술을 받게됐는 데 이때 심장을 이식받지 못했다면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황회장은 이로부터 8년후에 한 차례 더 심장이식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했었다. 교회출석을 하지 않았던 황회장은 두 번의 심장이식수술을 통해 생명을 건지는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게되었다고 부인은 전했다.
황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재직시 한국에 나가 1998~2003년 대한민국 공무원 연금관리공단 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장녀 쌜리 황씨는 “아빠가 열심히 일하고 투쟁하면 큰 성과를 얻을 것이라고 교육시켰다”고 밝히고 “자신과 여동생을 데리고 LA레이커스 경기와 LA다저스 경기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황제선 회장은 1997년 사랑의 빛 선교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임직했으며 2015년 9월20일 남가주새누리교회에 등록했다. 고 황제선 회장의 유족으로 부인 황태순 권사, 장녀 쌜리, 차녀 앤젤라, 손녀 은혜 등이 있다.
조사- 장녀 쌜리My younger sister and I were born in America. Dad provided a very good life for us. Even though Dad was from a different generation and different culture, he didn’t raise me and my younger sister with sexist views.
When we were children, Dad took my sister to Lakers basketball games. And he took me to Dodgers games.
After my daughter 은혜 was born in 2008, nothing else mattered to Dad. He loved his new name, Grandpa.
은혜 and Grandpa saw each other in late January. Then Coronavirus came. 은혜 and I quarantined in New York during the pandemic. Dad desperately missed 은혜 for almost eight months.
은혜 and I were quarantining in New York. We came back in mid September and since then 은혜 and grandpa saw each other every day to make up for lost time. Then Dad fell on October 6 and was admitted to the hospital.
Dad endured eight days of several uncomfortable treatments, so that he could ultimately be comfortable at the end. My promise to Dad was that he would not die in a hospital and that he would not die alone.
After 64 hours 55 minutes in 은혜’s home, Dad finally gave himself permission. He was at peace and without pain and with the knowledge that everything and everyone would be okay.
Dad was a freedom fighter. And now Dad is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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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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