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조민구 한국 교향악단 설립자 겸 지휘자
▶ 1969년 교향악단 연주에 천여명 관객감동, 1991년 한인 최초 할리웃보울 음악회 지휘…동양인 최초 세계 최고지휘자 마텔상 수상
조민구 지휘자는 한인사회의 문화 개척자로서 열정과 왕성한 활동으로 한인 음악인을 육성하고 발굴하여 수많은 연주기회를 주었고 최초의 한인 할리웃보울 연주자, 동양인 최초의 세계 최고지휘자 마텔 상 수상자로 유명하다.
“아빠는 이민 초기 가족을 부양하면서 생계가 힘들었을 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플롯을 팔아야했는데, 나중에 우리 자매가 돈을 모아서 수 십년후에 좋은 플룻을 다시 사드렸을 때 얼마나 좋아하셨는 지 모릅니다”
지난 16일 향년 88세의 나이에 별세한 조민구(사진) 한국 교향악단 설립자 겸 지휘자의 차녀 앤 조씨는 “선물로 받은 풀룻을 받고 감격한 아빠가 밤새도록 연주를 하시다가 침대에 놓고 잠든 일이 아직도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1969년 ‘한국 교향악단(Korean Philharmonic Orchestra)’을 설립해 한 평생을 미주한인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힘써온 조민구(미국명 레이몬드) 지휘자가 지난 16일 향년 88세에 별세했다. 조씨는 1932년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부친 조동철씨와 모친 김병하씨의 3남1녀 가운데 3남으로 출생했으며 서울 중앙고교를 거쳐 1955년 육군군악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때 이미 플롯을 연주했으며 중학교때 왠만한 관악기는 모두 연주했다. 6.25가 터지자 3형제가 한꺼번에 군대에 입대했는데, 큰 형은 군의관, 작은 형은 일선으로 조씨는 육군군악대에 지원했다. 군대에서 4년제 육군군악학교를 졸업해 교관으로도 3년간 복무했다. 동시에 육군교향악단 플룻주자로 활약하면서 지휘자의 꿈을 키웠다. 제대후 1955년 KBS 교향악단창단 단원이 되었고 1959~1960년에 모교인 중앙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밴드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전국에서 제일가는 밴드로 만들었다. 매카나기 전 주한미국대사의 플룻 개인 교사로 각별한 친분을 맺기도 했다.
28세인 1960년 12월에 도미해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에 입학해 3년만에 중고등학교교사및 주니어칼리지 교사자격증을 따고 석사과정을 1965년에 마쳤다. 그후 1965년 하이든 음악학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캄튼의 웰리 중학교와 할리웃의 셔먼음악학교 및 대학과정의 유뱅크스 음악학교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4년 부인 조장옥씨를 만나 결혼했으며 권길상, 조광혁, 성악가 이우근씨 등과 함께 한인예술단체로는 처음으로 남가주 한인음악가협회를 창립해 한인음악계의 ‘전초기지’를 닦는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첫 10년 동안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굳힘과 동시에 자신이 지휘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초작업을 마쳤다. 이는 곧 그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한국 교향악단의 탄생에 그대로 이어진다.
1969년 10월 앰버시 극장에서 있었던 한국 교향악단 창단기념공연에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였던 1,000여명의 관중이 모였다. 이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 ‘운명’의 연주와 한국에서 특별초청된 소프라노 김천애씨의 글썽거리며 부르는 ‘봉선화’ 노래에 감격했다. 조씨의 인생을 통해 가장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 준 순간이었다.
1960년에 유학 온 그는 1969년 한국일보의 태동을 고스란히 지켜 본 산 증인이자 창간독자이기도 하다. 그는 창간독자 인터뷰를 통해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한국일보부터 읽습니다. 한국일보는 제 이민생활의 동반자이자 하루의 시작이죠”라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향악단 협연자 가운데는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피아니스트 서주희, 그리고 오현명, 안형일, 엄정행, 이규도 씨 등의 성악가도 포함됐다.
또한 1985년에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상해교향악단(단원90명)의 특별공연을 지휘해 중국 매스컴으로부터 동양과 서양의 절묘한 조화라는 절찬을 받았다. 곡목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 5번과 룻시니의 윌리암 텔 서곡 등으로 그의 중국여행기가 본보에 1986년 2월에 “지휘자 조민구, 중공음악기행‘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기사로 소개되었다. 이어서 1990년 3월 중국 경제특구 심천의 심천교향악단으로부터 지휘 요청을 받아 USC 피아노교수 토마스 라이만스톨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 8번을 성공적으로 협연한 뒤 그곳의 상임지휘자로 위촉받는 영예도 누렸다. 이밖에도 홍콩, 일본, 태국, 대만, 필리핀, 오키나와, 베트남 등에서 지휘했다.
지난 1991년 3월31일 걸프전 승리를 축하하는 제 71회 할리웃 보울 음악회의 감격적인 무대에 섰다. 70여명의 단원과 2,000여명의 합창단이 참가한 걸프전 승리 기념공연이었는데 그는 ‘성조기여 영원하라’, 헨델의 ‘메시야’를 비롯한 여러 곡을 연주해 2만여 청중으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할리웃보울의 수많은 관중앞에서 지휘봉을 높이 든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1991년 10월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세계에서 지휘자로 최고의 상인 마텔 상(Prix de Martell) 지휘자 상을 수상했다. 뉴욕에서는 주빈 메타가 수상했고 시카고에서는 시카고 심포니의 조지 솔티가 받을 정도로 권위있는 상을 LA에서 그가 받은 것이다.
미 언론에 수상내용이 보도되어 한인 음악인의 위상을 미 주류사회에 드높였고, 같은 해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공로장을 받았다. 또한 캘리포니아주정부, LA시정부, 주상하의원과 LA 한인회, 한국일보 등으로부터 부터 감사패와 공로장을 받았다.
당시 탐 브래들리 LA시장, 제리 브라운 가주주지사, 지미 카터 대통령 등과 음악을 통한 친분과 교유를 쌓기도 했으며 음악을 통해 모든 커뮤니티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1993년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동원되는 모든 악기들로부터 곡의 흐름과 노래하는 이의 음색에 이르기까지 다 알아야하기 때문에 지휘가 어렵다”며 “지휘는 단순히 교통정리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음악성을 연주자를 통해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지휘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또한 조씨는 한인사회를 위해 한흑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인종화합음악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남북통일 가곡의 밤, KBS·MBC와 함께 한 가곡의 밤, 불우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 등 한인사회의 주요음악회를 모두 100여차례 넘게 이끌어 왔으며 2013년 11월17일 본보 후원으로 이벨극장서 은퇴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한흑음악회에서는 타 커뮤니티의 음악인들이 한국가곡을 불러 인종 간의 문화의 벽을 넘어 음악으로 화합을 이끌었다.
그동안 ‘한국 교향악단’은 LA이벨극장, 디즈니콘서트홀, 할리웃보울, 윌튼 극장, 세리토스 Performing Art Center, UCLA 프로이드 플레이하우스 등에서 한인 교향악단 연주회수로는 최대인 111회 연주를 마쳤다.
한인 음악계에서는 조민구 지휘자가 50년 가까이 한인사회의 문화 개척자로서 열정과 왕성한 활동으로 한인 음악인을 육성하고 발굴하여 수많은 연주 기회를 주었고 미 주류 음악사회와 한인 음악계의 교량적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 조민구 지휘자의 유족으로 부인 장옥씨, 장녀 엘리자벳, 차녀 앤, 삼녀 수잔, 큰 형 선구씨, 여동생 온구 씨 등이 있다. 조씨의 하관예배는 오는 9월4일 오전 9시30분 포레스트 할리웃힐스 메모리얼 공원(6300 Forest Lawn Dr)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을 한 상태에서 누구나 참석이 가능하다.
연락처 (213)713-6797
<
박흥률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