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석호 가주하원의원 모친 홍우님 권사
▶ 선거 전단지 돌리며 아들 어바인 교육위원당선 수훈갑, 장한 어버이상 수상, 베델임마뉴엘 성경대학 졸업…첫째 홍역으로 잃고 장남된 최의원 사랑 유독깊어
홍우님 권사는 억척스러운 모성과 극성스러운 교육열로 최석호 의원 등 3남5녀를 정치인과 의사등 전문인으로 키웠다고 유족측은 회고했다.
“장남인 저를 더욱 유독히 사랑하셔서 항상 ‘우리 석오, 우리 석오’ 하시면서 형제 자매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지난 6월19일 97세에 별세한 홍우님(사진) 권사의 장남 최석호(공화·68지구) 가주하원의원은 “모친은 위로 큰형을 3살때 홍역으로 잃은 것이 한에 맺혀, 둘째인 저도 죽을까봐 신경을 특별히 쓰다 보니 저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지시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최석호 가주하원의원의 모친 홍우님 권사는 지난 1924년 2월7일(음력)전남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반송에서 풍산 홍씨 댁의 거부 막내 딸로 출생해 호강을 하면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큰 오빠(최의원의 외숙)가 일찍 상처해, 외숙모와 사이에 출생한 어린 두 딸의 친구 겸 ‘대모’ 같은 역할을 하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최의원의 외사촌 되는 두 누님은 모친에게 “고모,고모” 하면서 무척이나 따르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941년 최창규씨와 나주에서 결혼한 홍우님 권사는 장남 석호, 차남 석영, 3남 석윤, 장녀, 옥희, 차녀 순희, 3녀 미희, 4녀 미영, 5녀 희영 씨 등 3남 5녀와 22명의 손자, 손녀를 뒀다. 농가의 큰집, 즉 3남3녀가 있는 집안의 장남과 혼인해 농사일 뒷바라지와 자녀 교육에 전력을 다했다. 최석호 의원이 초등학교 6학년때 여장부 기질을 발휘해, 부친을 목포 시청의 직원으로 취직시키는 기염까지 토했다.
그래서 최의원의 중학교 선택도 부친이 거주하는 목포의 제일 중학교로 지원을 하게 되었고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부친과 함께 친척집의 단칸방을 세 얻어 같이 자취를 했다고 한다.
홍권사의 부친은 어릴 때부터 딸에게 논어, 맹자, 대학 등의 고전을 읽게 하고 직접 가르쳤다. 시집 올 때 본인이 붓글씨로 쓴 수 권의 친필 책자를 갖고 올 정도로 학습열이 높았다. 그녀는 중국의 성장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 처럼 “두고 봐라, 앞으로 한문을 많이 배워두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하면서 한문공부를 강조했다고 한다.
또한 어린 최의원에게 “공부할 날 많다 하고 믿지 마세요. 무정세월 물결같이 지나가네. 청춘에 학문에 힘쓰지 않고 백발에 한탄을 어이 하리요!” 라는 노래를 귀가 따갑게 불러주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 자녀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특히 “나는 너희들에게 논, 전답 물려 줄 생각 없다. 왜냐하면 머리 좋은 놈들한테 다 빼앗길 수가 있으나 그것 팔아서 지식을 네 머리 속에 넣어 주면 그것은 아무도 뺏을 수가 없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최의원의 두 동생들까지 광주시로 전학을 시켜서 두 어린애들이 자취까지 하면서 공부하도록 시킬 만큼 교육열이 강했다.
모친의 교육열 덕택에 3남5녀의 자녀들은 정치인,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최의원이 한국에서 제대 후 미국으로 유학가 9년동안 모친을 뵙지 못하자 홍권사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동네 사람이 다 듣도록 설치된 스피커에서 ‘태평양 건너 ....’ 노래가 나오면 아들 생각에 목놓아 우셨다고 한다.
급기야 1984년, 환갑의 나이에 남편과 함께 도미해 손자손녀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미션비에호 장남집에 거주하다가 1986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가든그로브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한인봉제공장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특히 최의원의 정치인생은 모친의 열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어바인 교육구 교육위원으로 1998년 초선 운동을 할 때 아들의 선거 캠페인을 돕기위해 혼자서 선거 전단지를 미국인 이웃들에게 밤늦게까지 돌리다가 길을 잃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최의원은 “모친이 뿌린 선거 캠페인 전단을 보고 몇 표라도 더 얻어서 당선된 것이 확실하다”고 회고했다.
1997년 주 찬양교회 권사에 취임한 홍권사는 2007년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했고 2009년 베델 임마뉴엘 성경대학을 졸업했다.
최의원은 “저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많으셔서 저 또한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한 결과 미 주류사회의 정치인으로 한인들의 권익을 신장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조사 - 한국 거주 딸 최미희비행기안에서 어머니를 추모하며~~~
내 사랑하는 어머니는 이제 먼길 떠나셨습니다.
이제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눈물이 자꾸 나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지혜로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온유하셨습니다.
분노하고, 삐지고, 오기부리고, 화내며 큰 소리 지르는 것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가 좋으셔서.
동네사람 중 금성아짐이 해준 밥 한번 안먹어 본 사람 없고, 동네 초상나면, 상주들 상복 다 만들어 입히셨어요.
어머니는 부인으로서, 남편 섬김과 정갈한 음식과 의복도 잘 챙기셨습니다.
맞며느리로 시부모 봉양 다 하고, 삼년 상에 조석으로 따뜻한 식사 지어 올리고, 일년에 11번 제사, 정성껏 모셨습니다.
이번 골절상 입기 전까지만 해도 전화드리면 “신랑한테 잘해라. 애들 밥 단속해서 잘해 먹여라”하며 주부로 역할을 잘하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지요.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참 건강 하셔서,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프다고 등져 누워 계신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닮아 보고자 애쓰나, 어머니의 반의 반도 못따라 갑니다.
어렵고 답답한 일에도, 현명한 묘책을 내 놓으시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주발씩 치마자락에 숨겨, 남모르게 베푸셨습니다.
종아리 걷으라고, 회초리는 드셨지만, 화를 내서 감정적으로 자식을 때리거나, 큰 소리 치거나, 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이틀전까지 도우미분을 축복 해주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격려하신 분입니다.
한국에서 친정 엄마 없는 저는 애들 키울 때, 맨날 애기 들쳐 업고 큰 언니 집으로 달려가고, 미영이는 예윤이 출산하러 우리집으로 달려와야 했던, 우리는 친정엄마 없는, 짠한 딸들이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항상 그리운 딸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고생도 많으셨지만, 복도 참 많으신 분이십니다.
8남매 잘 키워 시집 장가 보내, 자손의 자손까지 보시고, 어머니께 서로 더 잘 해 드리고 싶어하는 자식들을 두셨으니까요
어머니 사랑했어요.
어머니 감사했어요.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
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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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엄마들 90%이상 헌신적으로 자식 에게 희생하거든